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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점: 강화도조약과 한불수호조약, 조선 천주교의 운명을 바꾸다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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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전환점: 강화도조약과 한불수호조약, 조선 천주교의 운명을 바꾸다

19세기 말, 잠겨 있던 조선의 문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근대화의 물결 앞에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오랜 박해의 그림자에 갇혀 있던 조선 천주교는 생존의 몸부림을 넘어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1876년 강화도조약과 1886년 한불수호조약을 기점으로 조선 천주교의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심층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강호도조약과 한불수호조약 천주교 운명을 바꾸다.

🌅 닫힌 문을 부수는 소리: 1876년 강화도조약과 미지의 미래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아래,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와 천주교 유입에 결연히 저항해왔습니다. 병인박해(1866년)와 병인양요, 신미양요(1871년)는 그 치열했던 저항의 역사적 증거였죠.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강제 체결되면서 조선은 닫혔던 문을 '공식적으로' 열게 됩니다.  

강화도조약은 비록 일본과의 조약이었지만, 이는 조선이 서양 국가들과도 문호를 개방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서양 세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죠. 물론 강화도조약 자체에 천주교 관련 조항은 없었습니다. 조선은 여전히 천주교를 서학(邪學)으로 규정하고 박해를 이어가려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이미 한 번 열린 문은 완전히 닫히기 어려웠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조약 체결 이후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은밀한 입국을 시도했고, 신자들 역시 더 큰 자유를 향한 희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오랜 암흑 속에서 비로소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던 과도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박해의 질곡: 여전히 깊던 그림자

강화도조약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은 여전했고, 이는 천주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서구 열강이 통상이라는 명분 아래 조선에 진출하려는 속셈이 천주교 포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이 조선 지도층에게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는 천주교 박해를 외교적 개입의 주요 명분으로 삼기도 했고요.

이 시기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으며, 여전히 지방 관아의 자의적인 박해나 유생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의 국가적 박해보다는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미약하지만 변화의 조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 역시 박해 속에서도 신자 조직을 정비하고, 끊임없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며 생존과 확장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 결정적인 전환점: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과 '신앙의 자유'

천주교 역사에서 진정한 전환점은 바로 1886년 6월 4일 체결된 **한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 중에서도 프랑스와 최초로 맺은 근대적 통상 조약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특히 프랑스가 천주교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서구 열강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에 나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조약은 조선 천주교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조약의 제4조에는 매우 중요한 문구가 포함됩니다: "조선 인민이 혹 외국인의 가르침(기독교)을 따르고자 하는 일이 있더라도 방해하지 아니한다."  이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제한적'이나마 공식적으로 인정된 순간이었습니다. 비록 "선교사가 자유롭게 포교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조선 정부가 더 이상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신자들을 조직적으로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박해 시대가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고, 천주교회가 법적 테두리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죠.

물론 조약 체결 직후 곧바로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방 관아나 보수 유림들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은 여전했고, 간헐적인 충돌과 제약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중앙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탄압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은, 천주교의 활동 공간을 비약적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새로운 지평: 개항기 천주교의 변화와 확장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조선 천주교는 비약적인 변화와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1. 선교 활동의 자유 증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이제 합법적인 신분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 은밀하게 들어오던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죠.
  2. 교세의 급성장: 더 이상 숨어 지낼 필요가 없어진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조직적으로 모일 수 있었고, 이는 곧 교세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신앙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3. 사회적 역할의 확대: 천주교는 단순히 종교적 포교를 넘어, 근대 문물과 서양 지식을 전파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습니다.
    • 교육: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여 서양 학문과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예: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 의료: 서양의학을 도입한 병원을 세워 민중의 질병 치료에 기여했습니다. (예: 제중원 등)
    • 출판: 한글 성경 번역과 인쇄술을 활용하여 서적을 간행함으로써 문맹 퇴치와 지식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4. 국제적 보호: 천주교는 이제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는 종교적 집단으로서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내부적인 박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외교적인 문제 발생 시에도 프랑스의 개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처럼 개항기 천주교는 '숨은 종교'에서 '드러난 종교'로, 박해의 대상에서 근대화의 한 축으로 그 위상이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 아픈 역사의 끝과 새로운 시작

강화도조약과 한불수호통상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중요한 이정표였고, 동시에 조선 천주교의 200여 년 박해 역사가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과거 천주교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우려와 유교적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인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이제는 국제 조약이라는 법적 기반 위에서 자유롭게 신앙을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조선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조약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운명뿐 아니라, 그 안에 뿌리내린 천주교 공동체의 삶에 거대한 변곡점을 가져다주며, 근대 한국 사회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역사는 항상 명과 암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개항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가져온 것은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아픈 현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복합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천주교는 살아남아 스스로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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