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삼·홍봉주 신앙 (1866년) - 병인박해 당시 고위급 관료 출신 천주교인
1866년 봄, 조선의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두 명의 고위 관료가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승지를 지낸 남종삼과 홍봉주였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바로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었죠. 이 사건은 조선 말기 가장 혹독했던 종교 탄압인 병인박해의 상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전통적인 쇄국 정책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개방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절실했던 것입니다.
병인박해, 그 시작의 배경
흥선대원군의 고민과 결단
병인박해는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간 지속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천주교 탄압이었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8,00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흥미롭게도 이 박해의 시작은 의외의 계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펼치며 조선을 위협하자, 천주교도인 홍봉주와 김일호 등이 흥선대원군에게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주교 주교를 통해 서구 열강인 영국이나 프랑스와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서자고 건의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제안이 나름 합리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곧 이것이 천주교의 포교 확산을 위한 계략이라고 판단하게 되었고, 결국 강력한 탄압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남종삼, 학자에서 신앙인으로
청백리의 삶을 살던 관료
남종삼 요한은 1817년 충주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던 그는 184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1846년에는 경상도 영해 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행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남종삼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재물과 권력에 욕심이 없는 청백리였습니다. 그의 인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후 정3품 승지까지 오르며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을 정도로 신망을 얻었습니다.
신앙과의 만남, 그리고 갈등
남종삼이 언제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의 신앙생활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관직에서 요구되는 여러 의례들이 천주교 교리와 충돌하면서 한때는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다시 신앙의 품으로 돌아와 더욱 독실한 신앙생활에 매진했습니다.
특히 그는 조선에 온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고위 관료로서의 지식과 경험을 선교 활동에 보태려 했던 것이죠.
홍봉주와 개방적 사고
홍봉주 역시 관료 출신의 천주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남종삼보다 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구와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조선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했던 것도 그의 이런 성향을 보여줍니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그는 종교를 넘어 실용적인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비록 그 방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시각은 상당히 앞선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들
체포와 고문의 나날들
1866년 2월,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남종삼과 홍봉주는 차례로 체포되었습니다. 남종삼은 고향인 충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피하려 했지만, 결국 2월 25일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혹독했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회유와 협박이 계속되었지만,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높은 관직에 있었던 만큼 더 큰 기대와 실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1866년 3월 7일, 그날
운명의 날인 3월 7일이 밝았습니다. 이날은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굳건했습니다. 남종삼은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50세의 나이였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들
지식인 천주교인의 의미
남종삼과 홍봉주의 순교는 조선 후기 지식인층이 천주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 신념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죽음은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얽혀있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개방을 통한 근대화를 꿈꾸었던 이들의 시각과 전통적인 쇄국 정책을 고수하려던 기존 세력 간의 충돌이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시간이 흘러 1968년 시복되고 1984년 시성된 남종삼과 홍봉주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의미를 던져줍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신념을 지키는 것의 소중함과 동시에 관용과 이해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1866년 봄날, 서소문 밖에서 스러져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선택과 그 결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남종삼과 홍봉주가 꿈꾸었던 것은 아마도 더 나은 세상, 더 열린 사회였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꿈은 그 자신들의 죽음으로 끝났지만, 그 뜻은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 사상의 다양성,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