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동점의 파도 속, 척화비: 1871년, 쇄국의 의지를 만방에 알리다
19세기 중반 조선은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습니다.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은 서양 세력의 접근을 알리는 전조였고, 천주교는 핏빛 박해 속에서도 끈질기게 뿌리내리며 사회 전반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었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강력한 국내 개혁과 함께 서구 세력에 대한 배척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에는 1871년 전국 각지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 건립 사건이 있었습니다. 척화비는 단순한 돌비석이 아니라, 서양 세력과 천주교에 대한 대원군의 단호한 금지 의지를 만방에 천명하며 쇄국의 상징으로 우뚝 솟아났던 역사적인 증거물입니다.
1. 쇄국의 배경: 서세동점의 위협과 천주교 박해
19세기 중반 조선은 서양 열강의 침략적인 접근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집어삼키는 서양 세력의 모습은 조선에게도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죠. 특히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해안에 접근했고, 이는 '이양선'이라 불리며 백성들에게 큰 두려움과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천주교는 조선 내부에서 꾸준히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 되어 오히려 교세가 확장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죠. 하지만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서양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등 대규모 박해가 이어졌지만, 천주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서양 세력과 천주교에 대해서는 강력한 척결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인 질서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고 천주교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척화비 건립의 직접적인 계기
척화비 건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입니다.
병인양요는 1866년 발생한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수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사건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성 침략이었습니다. 프랑스 극동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서양 세력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원군에게 서양 세력의 위험성과 천주교의 서양과의 연계를 더욱 확신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1871년에는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을 빌미로 한 미국의 침략인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습니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강화도를 침략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 주요 요새를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결사항전하며 미군에 맞섰고, 결국 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습니다. 신미양요의 승리는 대원군에게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했고, 그의 척화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차례의 양요를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은 침략적이며, 오직 싸워서 물리쳐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강경한 척화론을 전국민에게 각인시키고, 다시는 서양과 화친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척화비였습니다.
3. 척화비 건립: 쇄국 정책의 상징이 되다
신미양요 직후인 1871년, 흥선대원군은 전국 팔도와 주요 요충지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지시했습니다. 척화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1미터가량의 비석으로, 다음과 같은 척화의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유(1871)년에 세우고, 병인(1866)년에 지음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배척 의지를 간결하면서도 단호하게 표현한 문구였습니다. 비석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글이 병인년(1866년)에 지어졌으며 계유년(1871년)에 세워졌음을 명시하여, 병인양요 이후부터 척화 의지가 확고했음을 강조했습니다.
척화비는 도성 안 종로를 비롯하여 각 군현의 길목, 시장, 나루터, 포구 등 백성들의 통행이 잦은 곳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고를 넘어, 백성들에게 척화의 정신을 주입하고, 서양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천주교를 멀리하도록 강력하게 압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척화비는 흥선대원군 시대의 강력한 쇄국 정책과 척화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 되었습니다.
4. 척화비에 담긴 의미와 파급효과
척화비 건립은 당시 조선 사회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와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 대외적 쇄국 의지 천명: 척화비는 조선이 서양 세력과의 어떠한 교류도 원치 않으며, 침략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진 것이었습니다. 이는 서구 열강에게 조선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습니다.
- 천주교에 대한 금지 재확인: 척화비의 문구에는 직접적으로 천주교라는 단어가 없지만, '서양 오랑캐(양이)'가 침범하는 것과 '화친(和)'을 연결 지어, 천주교가 서양 세력의 침략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이는 천주교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박해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국내 정치적 안정 도모: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통해 강력한 쇄국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외부 세력의 간섭을 차단하고, 내부적으로는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자신의 개혁 정책을 안정적으로 추진하려 했습니다. 척화비는 백성들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위기감을 조성하여 자신의 통치에 대한 지지를 유도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 국민들의 의식 변화: 척화비의 문구는 당시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척화론을 대중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이후 개항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수적인 척화론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5. 척화비의 한계와 역사적 평가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정책은 장기적으로 볼 때 여러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척화비는 서양 세력의 침략 의지를 근본적으로 막지 못했고,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세계는 이미 서양을 중심으로 급변하고 있었고, 조선이 문을 닫고 고립을 자처하는 것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척화비에 담긴 극단적인 배척 사상은 이후 조선이 개항을 강요당하고,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큰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서양과의 외교 관계 수립과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 구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조선은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됩니다.
오늘날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의지와 자주적인 방어 노력의 상징인 동시에,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고립을 택한 조선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이 처했던 절박한 상황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고려할 때, 흥선대원군의 척화 정책이 단순히 고루한 배척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고뇌의 산물이었음도 함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6. 오늘날에 남겨진 척화비의 메시지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는 당시 세워졌던 척화비들이 여전히 남아있거나 복원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들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19세기 말 조선이 겪었던 격동의 역사와 그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척화비는 우리에게 중요한 역사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첫째, 국가적 위기 앞에서 자주적인 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의 중요성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쇄국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지만,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그의 의지는 높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둘째, 변화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의 필요성입니다. 척화비의 굳건한 외침 뒤에는 고립으로 인해 놓쳐버린 기회와 아픔 또한 존재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척화비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위치와 나아갈 길을 다시금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척화비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