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최악의 패륜(?) 사건?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대체 왜 그랬을까?
여러분, 조선 후기! 서양 오랑캐들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흥선대원군은 "쇄국만이 답이다!"를 외치던 그 혼란의 시대를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파헤치려 했던 희대의 도굴 미수 사건에 대해 파헤쳐 볼 겁니다! 🕵️♀️ 과연 오페르트는 왜 이런 미친 짓(?)을 저질렀고, 그 파장은 어땠을까요? 같이 타임머신 타고 1868년으로 가보시죠!
🌍 문 열어라 조선! 오페르트의 눈물겨운(?) 조선 개방 시도
먼저 주인공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는 대체 누구냐고요?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인이었어요. 상인이니까 당연히 돈 벌려고 조선이랑 통상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1866년(고종 3년), 조선에 냅다 "우리 무역하자!" 하고 접근했는데, 조선은 '철옹성 쇄국정책'으로 철통같이 막고 있었던 때라 두 번이나 거절당해요. 컷! 🚫
솔직히 말해, 오페르트는 조선과 교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것 같아요. 심지어 조선 사신 한 명을 초빙해서 세계 일주까지 시켜주려 했다는 계획까지 있었다니까, 나름 큰 그림을 그리던 인물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두 번이나 까이니 열이 좀 받지 않았겠어요? 여기서 오페르트의 똘끼가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
🤯 통상 거부? 그럼 패륜으로 협박한다! 도굴 모의의 시작
오페르트는 무역을 안 해주면... 아버지를 못 알아보게 하는 건가? 😅 아니, 농담이고! 통상을 거부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자 조선을 개방시키려는 일종의 '충격 요법'으로 기묘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자는 거였죠. 당시 조선은 유교 사상이 지배적인 사회였고, '효'는 국가의 근본이나 다름없었어요. 왕의 아버지 묘를 건드린다? 이건 진짜 상상할 수 없는 패륜이자 조선 전체의 어그로를 끄는 최악의 수였죠.
이 끔찍한 계획 뒤에는 오페르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어요. 병인박해(1866년) 때 조선을 탈출해서 프랑스 원정대의 길 안내까지 해줬던 프랑스 선교사 페롱, 그리고 이 모든 미친 짓에 자금을 댄 미국 상인 젠킨스까지 합세했답니다. 도굴 계획은 페롱이 제안했고, 젠킨스가 돈을 댔고, 오페르트가 총지휘를 맡았던 거에요. 와… 이 조합 실화냐? 😨
🚢 침투와 도굴 시도: ‘삽질’만 하다 실패한 비극
1868년(고종 5년) 4월 30일, 오페르트 일행은 1,000톤급 기선 '차이나호'와 소형 선박 '그레타호'를 끌고 중국 상하이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5월 10일 조선 충남 행담도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오페르트 지휘 아래 군복을 입고 소총으로 무장한 일당들이 그레타호와 훔친 조선 배에 나눠 타고 덕산군으로 상륙합니다. ㄷㄷ 그들은 군청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는 등 소규모 무력 충돌까지 벌였죠. 거의 영화 한 편 찍은 수준.
오후 5시경, 이들은 가야산 기슭에 있는 남연군묘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도굴을 감행해요.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납니다. 바로 무덤이 생각보다 너무 튼튼했던 것! 🤯
남연군묘는 단단한 돌로 덮여 있었어요. 예정보다 4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데다, 물때(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 쫓기기까지 하면서 도굴에 실패하고 맙니다. 애초에 이걸로 조선이 무릎 꿇을 줄 알았다는 것 자체가 조선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니냐고... 어이없죠? 결국 삽질만 잔뜩 하다가 무덤 하나 제대로 못 파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아까비~ 아니고 다행이죠! 😅
🌊 어둠이 짙어질수록 쇄국은 더욱 강해지고…
사건은 급박하게 전개되었어요. 덕산군수 이종신은 바로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고했고, 조선군은 급히 출동했지만 오페르트 일행은 이미 줄행랑친 뒤였죠. 도굴에 실패한 오페르트 일행은 인천 영종도 앞바다로 가서 다시 통상 교섭을 요청했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고, 조선 수비병과 충돌만 하고 아무 성과 없이 상하이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안 그래도 '서양 오랑캐'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대원군은, 아버님 묘까지 건드리려 했다는 소식에 '빡침'이 제대로 폭발하고 말죠. 😠 그는 서양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간악한지를 온 백성에게 알리고, 천주교 박해를 더욱 강화하며 쇄국 정책의 끈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게 됩니다. 바로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게 한 것도 이 사건 이후 대원군의 굳건한 반외세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어요.
📜 그들의 최후, 그리고 역사적 의미
그렇다면 오페르트 일행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사건은 국제적인 문제가 됩니다. 특히 미국 측은 이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금을 댄 젠킨스를 도굴 가담 혐의로 고소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젠킨스는 "난 돈만 댔지,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몰랐음 ㅇㅇ"이라고 주장했고, 오페르트 일행도 젠킨스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하면서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됐어요. 읭?
프로이센 영사와 프랑스 영사도 자국민들을 보호하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도 법적 책임을 면했답니다. 페롱은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이어갔고요.
하지만 주모자였던 오페르트는 좀 달랐어요.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를 인정하고 조사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오페르트는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3개월간 감옥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상인으로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조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고, 1880년에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금단의 나라: 한국 기행』이라는 책을 저술했어요. 이 책은 서양인이 본 조선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죠.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은 단순한 도굴 사건을 넘어, 당시 조선이 겪고 있던 혼란스러운 대내외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어요. 서구 열강의 거친 통상 요구, 그에 대한 조선의 필사적인 쇄국 의지, 그리고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까지!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벌어진,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역사적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다음엔 또 어떤 꿀잼 역사 이야기로 돌아올지 기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