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의 새로운 전환점: 주문모 신부 밀입국 (1795년)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7. 27.
반응형

조선의 새로운 전환점: 주문모 신부 밀입국 (1795년)

1795년, 조선 천주교사에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중국에서 파견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세례명 야고보(Jacobus)를 가진 이 중국인 신부의 밀입국은 이승훈의 영세로 시작된 조선 천주교가 비로소 완전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

조선 천주교의 절실한 필요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1784년) 이후 11년 동안 조선 천주교는 평신도들만으로 운영되어 왔습니다. 윤유일, 정약종, 이기양 등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어왔지만, 성사 집행 권한이 없는 평신도로서는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특히 1791년 진산사건으로 촉발된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조선 천주교도들은 정식으로 서품받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베이징의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신부 파견을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성사를 베풀 수 있는 신부가 없어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임종을 앞둔 이들도 마지막 성사를 받을 수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선교사 파견 결정과 주문모의 선택

베이징 교구에서는 조선 신자들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펴고 있었고, 외국인의 무단 입국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한 인물이 바로 주문모 신부였습니다. 1752년 중국 장쑤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접했고, 1780년 베이징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깊은 신앙심으로 베이징 교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조선 선교라는 어려운 임무를 자청한 것입니다.

 

위험천만한 밀입국 여정

1794년 베이징을 출발한 주문모 신부는 약 1년에 걸친 위험한 여정을 거쳐 1795년 12월 마침내 조선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입국 경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조선의 천주교도들과 미리 연락을 취한 후,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를 거쳐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윤유일을 비롯한 지도층 신자들이 비밀리에 연락망을 구축하여 주문모 신부의 안전한 입국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신부가 조선 관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한복을 준비하고, 조선어를 가르치며, 숨을 곳을 마련했습니다.

 

본격적인 사목 활동의 시작

조선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즉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그동안 평신도들이 베풀어온 성사들을 재검토하고 정식으로 성사를 집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승훈을 비롯한 초기 지도자들이 신부가 아니면서도 세례와 견진을 베풀어온 것이 교회법상 유효한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이들이 베푼 성사 중 상당수를 유효하다고 인정했지만, 일부는 다시 집행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세례를 받지 못했던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견진성사와 혼배성사도 정식으로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는 비로소 완전한 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선어 습득과 문화적 적응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서 효과적인 사목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는 놀라운 언어적 재능을 보여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조선어를 익혔고, 조선의 관습과 예법도 배웠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중국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작업에도 착수했습니다. 특히 『성경직해』와 『천주성교예규』 등을 번역하여 조선 신자들의 신앙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번역 작업은 조선 천주교가 중국 천주교에서 독립적인 색채를 갖추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자 공동체의 조직화와 확산

주문모 신부의 지도 하에 조선 천주교는 체계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각 지역별로 회장을 두어 신자들을 관리하게 했고, 정기적인 신자 모임을 제도화했습니다. 또한 예비 신자들을 위한 교리 교육 과정을 만들어 체계적인 신앙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조선 천주교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도착했을 때 약 4,000명이던 신자 수가 그의 사목 활동 6년 만에 1만 명을 넘어섰다고 전해집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천주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사회적 파장과 정부의 대응

주문모 신부의 활발한 사목 활동은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천주교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확산되자 조선 정부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조상 제사 거부 등이 유교적 신분제 사회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정조는 처음에는 서학을 학문으로만 여겨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지만,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천주교의 급속한 확산을 보고 점차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799년에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고, 신자들에 대한 탄압도 강화했습니다.

 

신유박해와 순교의 길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의 정치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주문모 신부는 자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 때문에 무고한 신자들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스스로 관아에 나타났습니다. 의금부에서의 문초 과정에서 그는 "조선에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당당히 밝혔고, 신앙을 포기하라는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801년 5월 31일, 주문모 신부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의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과 사목 활동은 조선 천주교사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조선 천주교가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에서 성직자가 있는 완전한 교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는 세계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체계적인 교회 조직과 신앙 교육 시스템이 구축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박해 시기에도 천주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천주교 서적의 한국어 번역을 통해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가 독자적인 특성을 갖추어 나가는 중요한 출발점이었습니다.

넷째, 주문모 신부의 헌신적 사목과 순교는 후대 선교사들과 한국 신자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의 선교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천주교의 중요한 영성적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은 단순한 개인의 선교 활동을 넘어서 한국 천주교사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결단과 헌신적인 사목, 그리고 장엄한 순교는 한국 천주교가 세계 교회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는 소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가 뿌린 신앙의 씨앗은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