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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의 출발점: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 (1784년)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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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의 출발점: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 (1784년)

1784년,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 베이징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역사적 순간은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 선택을 넘어서 조선 땅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승훈

베이징으로 향한 특별한 여행

이승훈은 진산 출신의 양반으로, 1783년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동지사 일행으로 베이징에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그에게 단순한 사신 수행이 아니었습니다. 출발 전 그는 이미 서학(西學), 즉 서양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학서들이 은밀히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이승훈 역시 이러한 서적들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베이징에서 직접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더 깊은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운명적 만남: 그라몽 신부와의 조우

베이징에 도착한 이승훈은 남당(南堂)에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신부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의 진지한 구도 정신과 천주교에 대한 깊은 이해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약 40일간의 교리 교육을 받은 후, 이승훈은 1784년 2월 베이징 북당(北堂)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그가 받은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조선 땅에 천주교를 전파할 사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름이었습니다.

 

귀국 후의 변화: 조선 천주교회의 기초 확립

이승훈은 세례를 받은 직후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 그는 이벽(요한 세례자), 정약종, 권일신 등 지식인들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나누며 전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명례방(明禮坊, 현재의 명동 일대) 김범우의 집에서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윤유일 등과 함께 비밀리에 종교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천주교 공동체였습니다. 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신도들이 스스로 기도 모임을 조직하고 교리를 전한 것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또한 베이징에서 배운 교리와 의식을 그대로 재현하여 조선식 천주교 미사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신부가 아니면서도 동료들에게 성사를 베풀기까지 했습니다.

 

조선 사회의 충격과 반발

천주교의 전파는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교리는 유교적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 사회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정조는 처음에는 서학을 학문으로만 여겨 관대했지만, 점차 종교적 색채가 강해지자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抄摘發事件)으로 명례방 집회가 발각되면서 조선 천주교는 첫 번째 시련을 맞았습니다.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고, 다른 신자들도 문초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해서 은밀히 전파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성장과 발전

이승훈의 노력으로 시작된 조선 천주교는 점차 조직화되었습니다. 1787년에는 윤유일이 조선교구 회장으로 선출되어 교회 조직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이승훈을 비롯한 초기 지도자들은 평신도 사도직 개념을 도입하여 성직자 없이도 신앙공동체를 운영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조선 천주교가 처음부터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양반 출신인 이승훈이 천민 출신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형제자매로 부르는 모습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순교의 길: 이승훈의 마지막

이승훈의 신앙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 속에서도 그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의금부에서 그는 "천주교를 조선에 처음 들여온 것이 자신"이라고 당당히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빨리 처형하라"고 말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1801년 4월 8일, 이승훈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그의 나이 46세였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현재적 의미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는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 체험을 넘어서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습니다. 첫째, 이는 조선 천주교회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의 선택 하나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토대가 된 것입니다.

둘째, 조선이 서구 종교를 자발적으로 수용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외국 선교사들의 전래를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과 달리, 조선은 자국민이 직접 외국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교회를 설립한 독특한 경우입니다.

셋째, 이승훈과 초기 천주교도들이 보여준 신앙의 순수성과 헌신은 오늘날에도 큰 감동을 줍니다. 그들은 물질적 이익이나 정치적 목적 없이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했고, 그 결과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세계 천주교회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승훈과 같은 초기 순교자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입니다. 그들이 뿌린 신앙의 씨앗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승훈의 베이징 영세는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넘어서 한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과 신념을 위한 희생,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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