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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금압의 공식화: 척사윤음 발표 (1839년)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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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금압의 공식화: 척사윤음 발표 (1839년)

1839년 기해년, 조선 천주교사에 또 다른 어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바로 헌종이 발표한 척사윤음(斥邪綸音)입니다. 이 교서는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공식 규정하고 전국적인 탄압을 선언한 역사적 문서로, 이후 조선 말기까지 이어질 천주교 박해의 법적, 이념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해박해의 절정에서 발표된 이 윤음은 조선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척사윤음

 

기해박해의 배경과 전개

1839년 기해박해는 조선 천주교사상 가장 혹독한 탄압 중 하나였습니다. 1838년 말부터 시작된 이 박해는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이 발각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천주교는 정치적 불안 요소로 간주되었고, 특히 외국 선교사들의 존재는 국가 안보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순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헌종은 당시 불과 8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정치 권력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수렴청정으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천주교를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척사윤음의 성격과 내용

척사윤음은 문자 그대로 '사교를 물리치는 임금의 교서'라는 뜻입니다. 이 문서는 단순한 행정 명령이 아니라 임금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적인 국가 교서였기 때문에 그 권위와 파급력이 매우 컸습니다.

윤음의 핵심 내용은 천주교를 '좌도(左道)'이자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를 믿는 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천주교의 다음과 같은 교리들을 조선의 전통과 대립되는 사악한 가르침으로 비판했습니다:

조상 제사 거부를 통한 효도 정신의 파괴, 부모와 임금에 대한 충효 의무의 포기, 서양 오랑캐의 종교를 받아들여 조선의 정체성 훼손, 외국인들과의 내통을 통한 국가 기밀 누설 우려 등이 주요 비판 내용이었습니다.

 

유교적 명분과 정치적 의도

척사윤음은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강한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첫째, 정치적 반대 세력 제거였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안동 김씨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탄압을 통해 이들을 제거하고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둘째, 민심 수습과 통치 정당성 확보였습니다.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이 심각한 상황에서, 천주교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민심을 결집시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전국적 탄압의 시작

척사윤음 발표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각 지방관에게는 관할 지역 내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신고 포상금 제도도 도입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탄압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과거의 박해가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집중되었다면, 기해박해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특히 내포 지역(충청남도 서북부)은 천주교 신자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곳으로, 이곳에서만 수백 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순교

척사윤음이 특히 강조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조선에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으로 규정되었고, 이들을 숨겨준 조선인 신자들도 '반역자'로 처벌받았습니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순교는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고, 특히 프랑스는 이를 자국민에 대한 탄압으로 간주하여 훗날 병인양요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신자들의 순교도 이어졌습니다.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 저명한 신자 지도자들이 차례로 순교했고, 평신도들도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모두 척사윤음에서 규정한 '사교도'로 분류되어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회적 파장과 민심의 반응

척사윤음 발표와 기해박해는 조선 사회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이 사건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부는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며 천주교를 위험한 종교로 인식했습니다. 특히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양반층에서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의 착한 품행과 자선 활동을 직접 목격한 일반 백성들 중에는 정부의 탄압이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의 은밀한 지속

척사윤음과 기해박해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신자들의 신앙은 더욱 깊어졌고, 조직은 더욱 은밀하고 견고해졌습니다.

생존한 신자들은 더욱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여성 신자들과 어린이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해 신자들 간의 연락을 담당하고 교리를 전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지방의 외진 산골 마을들로 피신한 신자들은 화전민으로 위장하여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일반 농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은밀히 천주교 신앙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국제적 파급 효과

척사윤음과 기해박해는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들의 순교를 빌미로 조선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조선 정부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외교적 압력을 가했습니다. 이는 훗날 1866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중국을 통해 조선의 천주교 탄압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문명화되지 않은 미개한 나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척사윤음은 조선 천주교사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 탄압 선언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박해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척사윤음은 천주교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공식 문서였습니다.

둘째, 유교적 명분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합된 탄압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통 문화 수호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세도정치 세력의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셋째,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의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설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혹독한 박해를 통해 신자들은 순교 정신을 체득했고, 이는 한국 천주교의 독특한 영성적 전통이 되었습니다.

 

 

현재적 의미와 교훈

척사윤음과 기해박해는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종교의 자유와 관용의 중요성, 정치권력의 종교 탄압 위험성, 그리고 신념을 위한 희생의 의미 등은 현재에도 유효한 주제들입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 만날 때 나타나는 갈등과 그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조선 사회가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문화적 충돌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척사윤음은 비록 천주교 탄압을 위한 문서였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천주교가 더욱 견고한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련을 통해 한국 천주교는 독특한 순교 영성을 발전시켰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천주교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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