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새로운 희망: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귀국 (1849년)
1849년 12월, 조선 천주교사에 새로운 희망의 빛이 비춰졌습니다. 바로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崔良業, 1821-1861) 신부가 마카오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세례명 토마스(Thomas)를 가진 그의 귀국은 김대건 신부 순교(1846년) 이후 절망에 빠져 있던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후 12년간 그가 펼친 헌신적인 사목 활동은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순교 후의 절망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조선 천주교는 다시 한 번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조선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죽음은 신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겨우 1년여의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외국인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기해박해(1839년)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 새로운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성사를 받을 수 없었고, 체계적인 신앙 교육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최양업 신부의 귀국 소식은 그야말로 단비와 같았습니다.
최양업의 성장과 유학 과정
최양업은 1821년 충청도 청양에서 천주교 신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훗날 기해박해 때 순교하게 됩니다.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도 신심 깊은 신자였습니다.
1836년 15세의 나이로 김대건, 정하상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은 13년간의 긴 공부 기간을 거쳤습니다. 그는 라틴어, 철학, 신학 등을 배우며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특히 그는 뛰어난 언어 능력을 보여 중국어는 물론 라틴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했습니다.
1845년 김대건과 함께 상하이에서 부제품을 받은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마침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25년간의 기도와 준비 끝에 이루어진 서품이었습니다.
험난한 귀국 여정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즉시 조선행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귀국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가 불과 3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상인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1849년 12월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은 그는 먼저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1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를 신자들은 눈물로 맞이했습니다.
특히 그의 어머니 이성례와의 재회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들이 사제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본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에 내려주신 가장 큰 은혜"라며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본격적인 사목 활동의 시작
조선에 도착한 최양업 신부는 즉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그동안 성사를 받지 못했던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고해성사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 순교 후 3년여 동안 신자들은 정식 성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목 활동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신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주로 밤에 이동하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위험한 생활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전라도 등 전국 곳곳의 신자 공동체를 방문하며 사목했습니다.
신자 교육과 공동체 조직
최양업 신부는 단순히 성사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신자 교육에도 힘썼습니다. 그는 각 지역의 신자 지도자들을 교육하여 자신이 없을 때도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국어로 된 교리서와 기도서를 편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교요리문답』, 『성교일과』 등을 한글로 번역하고 필사하여 신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러한 한국어 교리서들은 신자들의 신앙 교육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각 지역별로 회장과 부회장을 임명하여 체계적인 교회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신부가 없을 때 공동체를 이끌고, 새로운 신자들을 교육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역할을 했습니다.
끊임없는 순회와 위험한 사목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말 그대로 순교적 헌신이었습니다. 그는 12년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신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를 마다하지 않고 산길과 들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특히 그의 사목 활동은 항상 체포의 위험을 동반했습니다. 관헌들의 수색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그는 신자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굶으면서도, 때로는 추위에 떨며 노숙하면서도 사목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편지에는 이러한 고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몸은 비록 고달프지만 영혼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주님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신자들과의 깊은 유대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과 매우 깊은 유대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성사를 베푸는 성직자가 아니라 신자들의 아버지이자 형제 같은 존재였습니다. 신자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각별히 돌보았습니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고, 병든 이들을 간호하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랑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신자들도 최양업 신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관헌들의 수색이 있을 때마다 신자들은 신부를 숨겨주고, 피신시키며, 때로는 자신들이 대신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문학적 재능과 한국어 발전
최양업 신부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찬송가인 『천주가사』를 지었습니다. 이 가사들은 한국의 전통 가락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신자들 사이에서 크게 사랑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어려운 신학 용어들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이는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건강 악화와 마지막 순간들
12년간의 혹독한 사목 생활은 최양업 신부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습니다. 끊임없는 이동과 불규칙한 식사, 추위와 더위,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는 그의 몸을 급속히 쇠약하게 만들었습니다.
1861년 봄부터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픈 중에도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베풀었습니다.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는 충청도 보령에서 40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였다고 전해집니다. 12년간의 헌신적인 사목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역사적 의의와 영향
최양업 신부의 사목 활동은 한국 천주교사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남겼습니다.
첫째, 김대건 신부 순교 후 절망에 빠진 한국 천주교에 새로운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한국 천주교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둘째, 체계적인 교회 조직과 신자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그가 만든 조직과 교육 체계는 이후 박해 시기에도 교회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어 교리서와 찬송가 제작을 통해 천주교가 한국 문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습니다.
넷째, 순교적 사목 정신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사목은 후대 한국 성직자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현재적 의미와 교훈
최양업 신부의 삶과 사목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신념, 타인을 위한 희생 정신, 그리고 문화적 토착화의 중요성 등은 현재에도 유효한 가치들입니다.
특히 그의 사목 방식은 현대 교회의 선교 방법에도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권위적인 가르침보다는 사랑과 섬김을 통한 감화, 지역 문화와의 조화,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 등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선교 원리들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비록 40세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가 한국 천주교에 남긴 유산은 영원합니다. 그의 순교적 사목 정신과 헌신적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천주교의 소중한 영성적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