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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기해박해, 오가작통법으로 이웃을 감시하다

by 기쁜소식 알리기 2025.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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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기해박해, 오가작통법으로 이웃을 감시하다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종교 탄압이 시작되다

1839년 헌종 5년, 조선 왕조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기해박해(己亥迫害)'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 탄압을 넘어서, 조선 사회 전체를 감시 체제로 바꾸어 놓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전통적인 향촌 자치 제도였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천주교 색출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오가작통법

 

오가작통법, 상부상조에서 상호감시로

오가작통법은 원래 조선 초기부터 시행된 향촌 행정 제도였습니다. 다섯 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어 서로 돕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죠.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이 제도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헌종과 대신들은 천주교도들이 은밀하게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존의 오가작통법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이제 다섯 집의 통장(統長)은 단순히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하고 보고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의심하라" - 강화된 감시 체제

강화된 오가작통법의 핵심은 '연좌제'와 '상호 감시'였습니다. 만약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발견되면, 나머지 네 집도 함께 처벌받는 시스템이었죠. 이는 자연스럽게 이웃들 간의 상호 감시를 부추겼습니다.

관청에서는 구체적인 감시 지침을 내려보냈습니다. "집안에 십자가나 묵주 같은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라", "평소와 다른 기도나 예배 행위를 하는지 관찰하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거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은 없는지 확인하라" 등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밀고 포상제, 이웃을 팔아넘기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밀고 포상제의 도입이었습니다. 천주교도를 신고하면 상당한 보상금을 주고, 때로는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반대로 천주교도를 숨겨주거나 신고하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이 따랐죠.

이 제도로 인해 조선 사회는 극도의 불신 사회로 변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이웃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심지어 가족끼리도 서로를 감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밀고 포상금을 노리고 무고한 이웃을 천주교도로 모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천주교 공동체의 붕괴

이러한 감시 체제는 천주교 공동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전까지 천주교도들은 비밀스럽게나마 모임을 갖고 신앙을 나누었는데, 오가작통법이 강화되면서 이마저도 불가능해졌습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더욱 효과적이었습니다. 도시와 달리 농촌은 이웃 간의 관계가 밀접하고, 외부인의 출입이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이나 천주교 지도자들이 신자들을 만나러 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해졌죠.

 

 

사회적 파장과 후유증

오가작통법을 통한 감시 체제는 단기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839년 한 해 동안 체포된 천주교도는 130여 명에 달했고, 이 중 대부분이 순교했습니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 외국인 선교사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운영되던 향촌 공동체가 상호 불신과 감시의 공간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이웃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집단주의적 전통이 훼손되었습니다.

 

 

역사의 교훈

1839년 기해박해 당시 강화된 오가작통법은 권력이 어떻게 기존 제도를 악용하여 사회 전체를 감시 체제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상부상조를 위한 제도가 상호 감시와 밀고의 도구로 변질되는 과정은, 권력의 의도에 따라 어떤 제도도 그 본래 취지와 정반대로 사용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이 사건은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이웃 간의 신뢰와 공동체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일깨워줍니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고, 감시와 밀고가 일상화된 사회는 건강한 공동체로 발전하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겨줍니다.

기해박해로부터 18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자유와 인권, 그리고 이웃 간의 신뢰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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